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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et me at me2DAY
2009/07/04 13:46 생각창고
 
 옛날, 한 마을에 신앙심 깊은 영주가 살았다.
 어느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온 마을이 물에 잠기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영주는 성의 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께 자신을 구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불어난 물을 따라, 뗏목을 타고 몇 사람이 영주를 구하러 왔다. 그러나 영주는, 자신은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거라며 괜찮다고 했다.
 물은 더욱 불어나 영주가 있는 성의 꼭대기까지 곧 물에 잠길것 같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서 영주를 구하러 왔지만, 영주는 역시 자신은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거라며 구조를 거부했다.
 이제 물은 영주의 허리까지 차올랐다. 다시 사람들이 헬리콥터를 타고서 영주를 구조하러 왔지만, 영주는 여전히 구조를 거부했고, 결국 그는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 영주는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하는 자신을 구해주지 않느냐며 하나님께 항의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러면 뗏목과 보트와, 헬리콥터는 누가 보냈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하셨단다.

 다양한 버전이 있는 이 이야기는, 교회에서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를 이야기할 때 언급되기도 하고 (물론 저러면 안 된다는 예로), 때로는 맑스주의자 등에 의해 '역사의 진보에 동참하지 못하는 종교인(곧 부르주아)'을 비판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전의 기억이, 이 이야기를 처음에 맑스가 했다는 것 같았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헬리콥터가 나오는 걸 보면 맑스가 한 이야기가 아닐 것 같은데, 그런 항목이야 전달되는 과정에서 충분히 바뀔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저는 '운명'에 대한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될 사람은 어차피 되고, 안 될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안 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운명을 믿거나 안 믿거나, 단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그 이야기가 맞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 이야기 속 영주는 '될(살) 사람'이었을까요, '안 될(죽을) 사람'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뗏목과, 보트와, 헬리콥터를 보내주셨으니 '될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그걸 다 거부하게 하셨으니 '안 될 사람'이었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만)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을,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다가 결국 스스로가 '안 될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내 운이 어디까지 되나 보자'라며 도박을 하는 도박꾼은, 자신이 파산하거나, 혹은 카지노를 파산시킬 때까지 게임을 계속할겁니다. '어디까지 되나' 보기 위해서라면 말이지요.
 하지만 무한한 자본을 가진 카지노와 싸운다면, 결국은 언제나 자신이 파산하는 것으로 '내 운'은 드러날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각 게임의 승률과, 각 게임에서의 보수Pay-off 대한 정보가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입니다. 확률과정을 설계하면, 정확한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전은 분명 필요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는 것은 안 됩니다. ('운명'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냥 '능력 수준을 벗어나는 도전'이라고 받아들여 주세요.)
 누구는 그럽니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노력한다면, 안 될 일은 없다."라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룬' 사람들입니다. 무엇에서건 성공한 사람들이고, '유한한'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했지만, '안 되는 일이 있었던'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적절한 수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절한 수준의 도전.
 이야기로 돌아가, 영주가 '뗏목 하나만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더라면,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에 감사하며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혹은 '보트 하나만, 헬기 한대만' 이라고 기도했더라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을텐데요.
 아마 그는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천사들이 내려와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는' 기적 따위를 기도했었을 겁니다. 그 결론은, 위에 이미 나와있지요.

 요즘, 새로운 환경에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나는 얼마만큼의 도전을 해야할까.
posted by 내껌
2009/07/02 10:39 갈무리장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상을 찾는다.
 처음에는 부모의 시선에서, 그 다음에는 친구들의 시선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을 비춰 줄 하나뿐인 거울을 찾아 나선다.
 다시 말하면, 사랑을 찾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누구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알고보면 (좋은 거울)의 발견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자신의 만족스러운 상을 비춰 주는 거울을 찾아냈을 때 흔히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 평행한 두 거울이 서로에게 기분 좋은 상을 비춰 주는 마법의 시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거울 두 개를 마주 보게 놓으면 거울 속에 거울이 비치면서 같은 이미지가 무수히 생겨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듯이 (좋은 거울)을 찾아내면 우리는 다수의 존재로 바뀌고 우리에게 무한한 지평이 열린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주 강하고 영원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두 거울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움직이는 존재다. 두 연인은 자라고 성숙하고 진보한다.
 그들은 처음에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동안 서로 나란한 길을 따라 나아간다 해도, 두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속도로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 또한 두 사람이 상대의 시선에서 언제나 똑같은 자신의 상을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면 결별이 찾아온다. 나를 비춰 주던 거울이 내 앞에서 사라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건 사랑 이야기의 종말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을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의 시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에드몽 웰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제 5권

 - 베르나르 베르베르, "" 1권

posted by 내껌
2009/06/23 23:52 어질러진 책상
 블로그를 또 옮겼습니다. 개인 서버를 만들어서, Textcube 설치해서 써 보다가, 다시 티스토리로 돌아왔습니다.
 개인 서버에서 사용하던 도메인, myggum.nonzip.net 도 2차 도메인으로 이쪽으로 연결해서, 방문하시던 분들의 입장에선 별로 다른 점을 못 느끼실 수도 있겠군요.

 새 기분 낼겸, 스킨도 바꿔봤습니다.
 조금 수정하는 중이라, 이곳저곳 이상하게 보이는 곳이 없지 않지만, 뭐 깔끔하니 맘에 드네요.
 본문 글 색이 조금 흐려서, 배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것 같아서, 수정할 계획입니다. 계획이긴 합니다.

 학기를 마치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한동안 블로그에 뜸했는데, 다시 글들을 쓸겁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포스팅을 존댓말로 할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건 아직 고민 중입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저 스스로가 아닌, 읽으실 분들을 위한 공지글 성격이기에, 존댓말로 씁니다.

 아무튼.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posted by 내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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